성 비오 10세회 총장과의 인터뷰 : Mater Populi fidelis의 발표에 관하여

성 비오 10세회 총장과의 인터뷰

Mater Populi fidelis의 발표에 관하여


“공동구속자라는 호칭을 거부하는 것은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의 여왕권을 찬탈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가톨릭 신자의 영혼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에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FSSPX.News:] 총장님, 지난 11월 4일 신앙교리부(이하 “DDF”)는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께 전통적으로 바쳐온 특정한 호칭의 사용을 제한하는 Mater Populi Fidelis라는 제목의 문서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대한 총장님의 첫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돈 다비데 파글리아라니:] 솔직히 말하면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비록 교황 레오 14세가 전임 교황과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싶다는 갈망을 이미 밝히긴 했습니다만, 로마의 부서에서 교회가 전통적으로 성모 마리아께 바쳐온 호칭—너무나 풍부한 의미를 갖는—의 사용을 제한하겠다는 문서를 발표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의 첫 반응은 거룩한 전통에 대한, 그리고 더더군다나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이 새로운 공격을 배상하기 위해 미사를 거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 문서는 ‘공동구속자’와 ‘모든 성총의 중재자’라는 호칭의 사용만 문제 삼은 것이 아닙니다. 이 두 호칭의 전통적인 의미도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거부하는 것은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의 여왕권을 찬탈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가톨릭 신자의 영혼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에 더더욱 심각한 일입니다. 정녕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와 함께 오주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가장 충격적이었습니까?

[돈 다비데 파글리아라니:] 첫째로, 공동구속자라는 호칭의 사용이 “항상 부적절하다”고 간주한다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이는 사실상 이 호칭의 사용을 금지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라고 하는 것이 이렇습니다: “어떤 표현이 그 올바른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반복적인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면, 그 표현은 천주의 백성의 신앙에 소용되지 않으므로 쓸모 없어진다.1”

자, 이 호칭은 의심스러운 발현 후에 발현 증인이 제시하는 해괴한 용어가 아닙니다. 교회가 수세기 동안 사용해온 표현이고 그 정확한 의미는 신학자들에 의해 분명히 확립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여러 교황들이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호칭을 몇 차례나 사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요한 바오로 2세입니다. 성 비오 10세는 비록 이 호칭 대신 “단죄된 세상을 위한 보속자 Reparatrix of the lost world”라는 호칭을 사용하긴 했지만 성모님의 공동 구속의 근거와 범위를 매우 분명히 정의했습니다.

성 비오 10세는 정확히 뭐라고 하셨습니까?

[돈 다비데 파글리아라니:] 성 비오 10세는 마리아에 대한 회칙 Ad diem illum(1904년 2월 2일)에서 마리아의 공동 구속과 심지어 보편 중재까지 매우 단도직입적이고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교황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그 아들의 생애의 마지막 때가 도래했을 때,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 마리아가 서 계셨으니, 마리아는 잔혹한 광경을 묵상하는 데만 몰두하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 외아들이 제헌되셨다는 사실에 기뻐하셨으며, 외아들의 수난에 그토록 온전히 참여하셨기에, 하실 수만 있었다면 아들이 겪으신 모든 고통을 기꺼이 그러안으셨을 것이다2’.
또한 그리스도와 마리아 사이의 이 결합된 의지와 고통에서 ‘마리아는 단죄된 세상의 보속자3’ 및 우리 구세주께서 그분의 죽으심과 성혈로 사들이신 모든 성총의 분배자가 되시는 공로를 지극히 합당하게 얻으셨다. 물론 이 보물의 분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하고 고유한 권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보물은 그분의 죽으심으로 인해서만 열린 그분만의 배타적 열매이며, 또한 그분께서는 본성적으로 천주와 사람 사이의 중재자이신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고통과 슬픔의 이 동반자 관계로 인해 장엄하신 동정녀께서는 ‘당신의 신성한 아들과 함께, 온 세상의 가장 능하신 중재자이시며 전달자4’가 되셨다.
그리고 그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모두가 그분의 충만함으로 은혜를 받았고5’ ‘몸의 모든 지체는 그분으로부터 말미암아 각각의 관절로써 맺어지고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며, 그 각각의 관절은 다시 각 지체에 맞갖게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며, 이로써 그 몸은 장성되고 사랑으로 인하여 형성된다.6’ 그러나 성 베르나르도가 옳게 말씀하신 것처럼, 마리아는 ‘수로7’, 혹은, 몸을 머리에 연결하여 머리의 영향력과 자유 의지를 몸으로 전달하는 기능을 하는 연결 부위이시다. 즉, 목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의 말씀대로 ‘마리아는 우리 머리의 목이시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신비체로 모든 영적 은혜를 전달하신다8’.
그러므로 우리는 천주의 모친께 성총을 생산하는 능력 —오로지 천주께만 속한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전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그분과의 일치 안에 모든 것을 온전히 지니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구속 사업에 참여하셨기에, 신학자들의 표현대로, 마리아는 우리를 위해 재량공로(裁量功勞, meritum de congruo)를 얻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적정공로(適正功勞, meritum de condigno)를 얻으시며, 마리아는 성총을 분배하시는 최고의 집행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높은 데에서 지엄하신 분의 우편에 좌정하여 계시고9’, 마리아는 그 아들의 우편에 좌정하여 계시니—‘마리아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토록 안전한 피난처이시고 그토록 믿음직한 도움이시므로 그분의 인도, 그분의 후원, 그분의 보호 아래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10’.11”

인용이 길었습니다만, 여기에는 DDF가 제시하는 교의적 입장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주목할 사실은, 성 비오 10세의 이 회칙은 DDF 문서 본문 말미의 각주에만 언급되어 있을 뿐, 본문 어디에도 인용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회칙이 (DDF 문서가 제시하는) 새로운 신학적 방향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DDF가 지금에 와서 공동 구속의 개념이 “항상 부적절하다”고 간주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다비데 파글리아라니:] 무엇보다도 에큐메니즘 때문입니다. 공동 구속(co-redemption)이라는 개념은 보편 중재(universal mediation)라는 개념이 그러하듯, 프로테스탄트 신학과 정신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두 개념은,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보편 중재를 신앙교의로 정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공의회 교부들과의 격론 끝에 결국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에큐메니즘에 자극된 이러한 배제 행위는 신앙의 약화라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대한 전통 가르침을 정기적으로 되새기지 않는다면, 이 가르침은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 문서를 만든 사람들은 이 호칭이 신앙에 위험하다고 진정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는 재앙입니다.
본문 전체가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오주의 중재와 그분의 고유한 역할의 독특성과 중심성을 어떤 식으로든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이 염려는 병적인 영적 편집증으로 보이며, 가톨릭 신자로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과연,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의지하여 마리아의 인도에 따르는 충실한 영혼이라면, 오주를 해치면서까지 마리아를 지나치게 공경하는 위험을 행여라도 감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으로 깨우쳐진 마리아 신심의 목적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주의 신비와 구속의 신비를 더 깊이 꿰뚫어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공의회 이전까지 잘 이해되고 실천되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터무니없는 악순환에 직면합니다: 우리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수단을 과도하게 사용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습니다. 그 수단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주어졌는데도 말입니다.

에큐메니즘에 대한 관심이 이번 바티칸 계획 이면에 숨은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다비데 파글리아라니:]  저는 또 다른 이유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로마 문서가 비난한 표현은 구속의 신비와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성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오늘날 구속의 개념 자체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희생제사”와 “천주의 정의를 배상하는 희생제사”라는 개념은 갈수록 버려지고 있습니다. 천주의 정의를 충족하기 위해 천주께 희생제사를 바친다는 개념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오주께서는 사실상 공로를 얻으실 필요도, 우리 죄를 보속하실 필요도, 속죄의 희생제사를 바치실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주의 자비는 인간의 죄라는 현실에 의해 변하지 않으니까. 천주의 자비는 무조건적이니까. 천주께서는 항상 순전한 관대하심으로 용서하시니까.
결과적으로, 오주께서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의 구속주가 되십니다. 오주의 죽음은 성부의 이 자비로운 사랑이 최고조로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12는 것입니다. 구속이라는 개념이 이렇게 왜곡되었기 때문에, 동정 마리아께서 구속사업과 왜 연관되시는지, 어떻게 연결되시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DDF 문서가 제시하는 경고는 방금 언급한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치 마리아가 천주의 자비가 부족한 탓에 필요한 대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리아를 주님의 정의에 앞서는 일종의 ‘피뢰침’으로 제시하는 호칭과 표현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13”

“공동 구속”의 개념으로 돌아가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돈 다비데 파글리아라니:] 무엇보다도 이 개념은 동질적으로 발전한 가톨릭 교의의 표현으로서, 널리 받아들여진 신학적 결론으로 여겨지고 심지어는 신앙 교의로 정의 가능한 진리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 개념은 복음 자체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오주께서 그분의 모친이 구속 사업과어느 정도로까지 연관되기를 바라셨는지를 표현합니다.
이 개념은 평행 구속(Parallel Redemption, 별도의 구속행위)도 아니고, 오주의 구속 사업에 추가로 덧붙여지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이 개념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과의 통합입니다. 절대적으로 유일한 방식의 통합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모 마리아의 마땅한 위상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빚어지는 당연한 결론들을 도출하는 것입니다.

DDF 문서가 의지하는 권위 있는 주장은 무엇입니까?

[돈 다비데 파글리아라니:] 이 문서는 “공동 구속 개념은 성경에 그 충분한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던 요세프 라칭거 추기경의 부정적인 의견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라칭거 추기경이 고수한 구속 이론은 전통에서 벗어난 것임을 우리는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14.
그러나 이 문서는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위에 의지합니다. 본문에 인용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글을 옮겨보겠습니다: “…마리아는 ‘그 아들의 것을 자신을 위해 유용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성모) 마리아는 자신을 공동 구세주로 내세운 적이 없다. 없고 말고. (성모) 마리아는 (단지) 제자였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은 완전했고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성모 마리아는 예수로부터 어떤 호칭도 빼앗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마리아는 유사 구속자 혹은 공동 구속자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았다. 그런 적이 없다. 구속자는 한 분뿐이시고 이 호칭은 중복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속자이시며 그리스도께 공동 구속자는 없다.’15”
저 글은 읽기 괴롭습니다. 저 글은 공동 구속이 근거하는 참된 이유를 비꼬는 풍자 만화(캐리커쳐)나 다름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모께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셨다’ —이는 터무니없습니다—가 아니라, ‘천주의 상지(Divine Wisdom)께서 성모께 그렇게 되도록 섭리하셨고 또 그렇게 요구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하나의 구속 사업에서 성모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맞갖은 보속의 행위를 바치도록 허용되신 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엄격한 정의에 따라 우리를 위해 보속하셨습니다. 성모께서는 완전한 애덕과 천주와의 독특한 결합을 통해, 오주께서 엄격한 정의에 따라 얻으신 공로를 우리를 위해 얻으시도록 허락받으신 것입니다.

공동 구속과 모든 성총의 중재 사이에 연관성이 있습니까?

[돈 다비데 파글리아라니:] 두 개념 사이에는 명백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모든 성총의 중재자”라는 호칭도 마찬가지로 (이 문서에서) 문제시되었습니다. 이 호칭의 사용이 이제 위험하다고 간주하면서 이를 강력히 만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구속 사업의 연관성 때문에, 그리고 오주께서 우리를 위해 얻으신 모든 공로를 성모께서도—비록 방법은 다르지만—우리를 위해 얻으실 수 있기 때문에, 성모께서는 이렇게 하여 얻으신 모든 성총에 대해 그 분배자가 되도록 오주로부터 친히 임명 받으셨습니다. 이는 전통 신학의 조사 결과일 뿐만 아니라, 조금 전에 되새긴 성 비오 10세의 교도권에서도 나온 것입니다.
물론, 이 DDF 문서는 성인들과 복되신 동정녀께서 공로를 얻으실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총의 분배에 있어서 마리아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중재에 암묵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16: “성총의 전달에 있어서 인간과 천주 사이의 완전한 근접성(immediacy)에는 심지어 마리아라도 개입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우정도, 성삼위의 거처하심도, 마리아 또는 성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무언가로 이해될 수 없다. 여하튼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마리아는 우리를 위해 이 선을 바라시고 그것을 요청하시되, 우리와 함께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17 […] 이 사실의 정당함은 오직 천주만이, 성삼위 천주만이 증명하신다. 오직 천주만이 우리를 신성한 생명과 분리시키는 무한히도 큰 부조화를 극복하도록 우리를 들어올리신다. 오직 그분만이 성삼위의 거처하심을 통해 우리 안에서 행하시고, 오직 그분만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키시어 우리가 그분의 신성한 생명의 공유자가 되도록 만드신다. 오로지 천주께 속한 이 사업의 성취에서 마리아에게 어떤 중재를 돌리는 것은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18”
실제로는, 앞서 이미 설명한 이유로,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우리를 위해 특정한 성총 뿐만 아니라 각각의 모든 성총을 우리를 위해 공로로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곁에서 그 성총을 획득하는 공로뿐만 아니라 이를 적용하는 공로도 얻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모께서는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기 전에 이 지상에서의 구속 행위에 구속자 그리스도와 결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모든 성총의 중재자”라는 호칭의 사용에 대해 경고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이 호칭이 동정녀의 역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보장하지 못한다고 간주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돈 다비데 파글리아라니:] 이 점에 관해, 우리는 이 글의 저자들이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선입견과는 다른 방식을 천주께서 원하셨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이를 전통이 설명할 수도 있다는 것— 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주께서는 유일한 중재자이시고, 구속사업은 오직 그분의 구속사업 하나 뿐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주께서는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한 그 수단 —십자가상 죽으심— 을 자유로이 선택하시는 것처럼, 당신께서 원하신 방법으로 그분의 사업에 그분의 모친을 연관시키시기로 자유로이 선택하셨습니다. 아무도, DDF 장관이라도, 오주께서 그분의 신성한 지혜에 따라 행동하시고 그분의 모친을 공동구속자이자 모든 성총의 보편적 중재자로 만드실 권능을 그분으로부터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오주께서는 공동구속자를 두시더라도, 그분의 구속자로서의 위엄에서 아무 것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완전히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오주의 이 선택의 결과는 분명합니다: 구원을 위해 그분께 의지하는 것이 필요한 만큼, (비록 방법은 다르지만) 그분의 모친께도 의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필요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오주의 명령, 교회의 성전(聖傳),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어진 수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완고함으로까지 보이는 이 선입견이 DDF 문서 본문에 자주 등장합니다. 몇몇 구절만 봐도 그렇습니다: “성삼위의 거처(창조되지 않은 성총)와 신성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참여(창조된 성총)가 불가분적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 신비는 마리아의 손을 통한 ‘길’에 의존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19”, “어떤 사람도—심지어 종도들이나 복되신 동정 마리아라도—성총의 보편적 분배자로 행동할 수 없다20”, “’모든 성총의 중재자’라는 호칭은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 관계와는 무관하게, 영적 선 또는 에너지를 분배하는 사람으로 내세울 위험이 있다21”.

사목적 관점에서 볼 때 DDR의 이 결정이 가져올 영향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돈 다비데 파글리아라니:] 제 생각에 다수의 재앙적인 부정적 파급효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우리는 마리아께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삶의 완전한 모범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은 구속 사업과 성모 마리아의 연관성을 최소화함으로써 각각의 영혼에게 십자가를 통해 구속, 배상 및 개인 성화의 사업으로 들어가라는 부르심을 축소시킵니다. 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삶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관점에 정확히 해당합니다. 프로테스탄트의 관점에는 우리를 성화하시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업에 ‘협력’이라는 요소가 자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루터는 수도 생활을 파괴했고 미사성제를 포함한 모든 선행을 ‘그리스도의 사업의 위대하심에 대한 범죄’로 간주했습니다. 그분의 사업은 그 자체로 완전하여 부연을 요구하지 않으므로 여기에 부연한다는 것은 그 완전성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는 주장입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는 정확히 그 반대를 고백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업은 주권적으로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 자체의 완전함에서 아무 것도 잃지 않은 채로 창조물의 협력을 아우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DDF의 이 결정은 현재 맥락에서, 특히 가장 단순하고 지극히 곤궁한 영혼들의 신앙과 영성 생활에 재앙을 초래할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적 및 도덕적 주변부’에 처한 영혼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종종 현재의 사막에 유일한 피난처로 남아 계십니다. 저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단순하고 진실한 신심이, 사제를 정기적으로 볼 가능성이 없는 영혼들의 구원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지를 제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마리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에 대해 영혼들에게 경고하려는 의도로 작성된 DDF 문서는 저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고 사목적으로 무책임하게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오늘날처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위대하심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영혼들을 배교와 불순으로 몰아넣는 세상의 압력에 직면하여, 성모 마리아의 위대하심은 이 압력에 저항하고 충실히 남아있기 위한 주권적 수단을 제공합니다.

이 글의 저자들에게 하실 사목적 조언이 있으십니까?

[돈 다비데 파글리아라니:] 오주께서는 천주와 인류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시고 참된 구속은 오직 하나, 그분의 구속사업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서는 칭찬할만한 일이고 특히 오늘날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악의적인 의도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소위 ‘간섭’ 또는 ‘경쟁’에 대해 경고하는 이 문서의 오류들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는 사람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 진리는 비 그리스도교 신자든 무신론자든, 유데아교, 불교, 이슬람교 신자들과 오주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땅히 전파되고 알려져야 합니다.
자, 10월 28일, 바티칸은 비 그리스도교와의 대화의 기초를 마련한 공의회 문서인 Nostra Aetate 반포 60주년 기념했습니다. 이 사건은 역설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대화라는 것이, 지난 60년 동안 가장 유감스러운 종교간 대화를 일으켰으며, 오주께서 천주와 인류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라는 사실과 가톨릭교회가 이 진리를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하고 노골적인 거부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총장님께서 보시기에 성모님에 대해 더 잘 알려져야 할 전통적인 개념이 있습니까?

[돈 다비데 파글리아라니:] 성모 성무일도의 전례에서는 성모님을 “모든 이단을 완파하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저는 신학적 연구를 통해 이 개념을 더 깊이 탐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성모님을 가톨릭 진리의 수호자로 간주하는 방식을 관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분의 모친으로서의 역할과 직결되는 것이니까요. 그분께서는 진리와 진리에 대한 사랑을 전하지 않고서는 우리 각자에게 오주를 낳아 주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오주께서는 인류에게 강생하여 계시되신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영혼들이 재생되고 오주의 모습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얻는 것은 신앙을 통해서, 그리고 신앙의 순수성을 통해서입니다.
저는 신앙의 순수성과 그리스도교 삶의 진실성 사이에 이 필연적 관계를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바로 모든 오류를 무너뜨리시는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기 위해 성모님을 공경하는 어떤 기도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돈 다비데 파글리아라니:] 주저없이, 전례에도 나와 있는 다음의 기도문을 선택하겠습니다:
“Dignare me laudare te, Virgo sacrata. Da mihi virtutem contra hostes tuos.
거룩하신 동정녀여, 나 너를 찬송케 하소서. 네 적들에 맞서 싸울 힘을 주소서.”

2025년 11월 9일 구세주 대성당 봉헌 축일에 멘징겐에서.


1 Mater Populi fidelis, n. 22.
2 S. Bonav. 1. Sent d. 48, ad Litt. dub. 4.
3 Eadmeri Mon. De Excellentia Virg. Mariae, c. 9.
4 비오 9세, 회칙 Ineffabilis.
5 요왕1:16.
6 에페소4:16.
7 Serm. de temp on the Nativ. B. V. De Aquaeductu n. 4.
8 Quadrag. de Evangelio aterno, Serm. X, a. III, c. 3.
9 헤브레아1:3.
10 비오 9세, 회칙 Ineffabilis.
11 비오 10세, 회칙 Ad diem illum.
12 이는 특히 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의 기초를 형성하는 파스카 신비라는 새로운 교리이다.
13 Mater Populi fidelis, n. 37, b.
14 특히 그의 저서 Introduction to Christianity(1968)는 저자가 서문을 첨부하여 2000년에 재발행되었다.
15 Mater Populi fidelis, n. 21.
16 이 본문의 가장 큰 오류는 물리적 중재physical mediation와 도덕적 중재moral mediation 사이에 고전적 구분을 하지 못한 것에 있다.
물리적 중재는 마리아께서 진정한 도구, 예를 들어 예술가가 연주할 때 조화로운 소리를 내는 하프처럼 성총을 전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 저명한 신학자들(레피시에, 위공, 베르나르도)은 이러한 영향력을 그리스도의 인성에 종속되신 동정녀께 돌리면서 주장하기를, 전통에 따르면 마리아께서는 신비체에서 목과 같이 머리를 지체와 결합시킴으로써 생명의 흐름을 지체에게 전달하신다고 했다. 
마리아께서 성총에 대해 오로지 도덕적 중재만 행하신다는 것은 적어도 마리아께서 당신의 보속, 과거의 공로 및 항존하는 중재를 통해 아들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성총을 영혼들에게 보편적으로 전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명제는 모든 전통 신학자들이 인정한다.
두 경우 모두에서, 마리아의 중재는 천주께서 자유로이 원하시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다.
이 본문은 마리아의 물리적이고 도구적인 중재를 부정하고 적어도 도덕적 중재에 관해 고전적 구분을 생략함으로써, 성총의 분배에 있어 마리아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중재를 전반적으로 부정하면서 부적절한 결론을 맺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동정 마리아의 중재의 양상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 보편성 또는 사실적 필연성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17 상게서 n. 54.
18 상게서 n. 55.
19 상게서 n. 45.
20 상게서 n. 53.
21 상게서 n.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