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비오 10세 사제회 총장과의 인터뷰 “최상의 법은 영혼들의 구원”
“’최상의 법은 영혼들의 구원이다.’ 바로 이 상위의 원칙에 우리 종도직의 정당성 전체가 궁극적으로 달려있습니다.”
- FSSPX.News: 총장님, 총장님께서는 방금 전에 성 비오 10세 사제회를 위한 주교 성성을 7월 1일에 거행하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이 선언일을 오늘 2월 2일로 택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돈 다비데 파글리아라니: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취결례 축일은 사제회 안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날입니다. 사제 후보자들이 수단을 받는 날이죠. 오늘 경축하는 성전에서의 주님 봉헌은 성품성사를 위한 사제 후보자들의 양성과 준비의 열쇠가 성모님의 손을 통한 자기 희생에 있음을 그들에게 상기시켜줍니다. 오늘이 중요한 성모님 축일인 이유는 시메온이 성모님께 통고의 칼을 선언하면서 그분의 거룩하신 아들과 함께 공동구속자로서 성모님의 역할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지상 생활이 시작될 때부터 갈바리아에서 그분의 희생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주님과 연관되어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성모님께서는 미래의 사제가 양성되는 동안과 그의 한평생을 그와 동행하십니다—그의 영혼 안에서 계속해서 주님을 빚으시는 분은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 이 선언은 최근 몇 달 전부터 끊임없이 소문으로 돌았던 내용입니다. 특히 2024년 10월에 티시에 드 말레 주교님의 서거 이후로 그랬습니다. 오늘에서야 발표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르페브르 대주교님 때와 마찬가지로 사제회는 천주님의 섭리를 앞지르는 것이 아니라 따르기를 항상 갈망해왔습니다. 섭리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이 정도로 중차대한 결정은 가볍게 혹은 성급하게 내릴 수 없습니다.
특히, 이 결정은 교회의 최고 당국을 관련시키는 것이므로 우리는 성좌에 말씀을 드리고—실제로 그렇게 했고—적절한 기간 동안 답변을 기다리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이 결정은 우리가 성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 총장님은 강론에서 교황님께 정말로 서한을 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작년 여름, 저는 성하께 알현을 청한다는 서한을 썼습니다. 답장을 받지 못했고, 몇 달 뒤, 저는 효심을 담아 솔직하게 우리의 모든 요구사항을 숨기지 않고 성하께 두 번째 서한을 썼습니다. 저는 우리의 교리상의 차이를 언급하면서도 가톨릭교회를 쉴 새 없이 섬기고자 하는 우리의 진실한 열망도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비록 교회법적으로는 비정상적인 지위에 있지만 교회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번째 서한에 대해 로마에서 보낸 답장이 며칠 전에 도착했습니다. 페르난데스 추기경이 보낸 것이었죠. 안타깝게도, 로마는 우리가 제시한 제안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우리의 요청에 부응하는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사제회가 처한 매우 특별한 상황을 반영한 이 제안은 구체적으로, 우리를 의지하고 있는 영혼들의 선익을 위해 우리의 일—우리가 처한 예외적인 상황에서 한시적으로—을 계속할 수 있도록 성좌가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교황님께 전통을 수호하고 교회의 충실한 참된 아들들을 양성하는데 우리의 온 힘을 기울이겠다는 약속을 드렸습니다. 제가 봤을 때 이 제안은 현실적이면서도 합리적이고, 그 자체로 성하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 그런데 아직 교황님의 승인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교 성성을 거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교 성성은 실질적이면서도 극단적인 필요에 맞먹는 극단적인 수단입니다. 사실, 영혼들의 선익을 위한 필요가 존재한다고 해서 이에 부응하기 위해 어떤 주도권 같은 것이 저절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오랫동안 기다리고 관찰하고 기도한 결과, 오늘날 영혼들과 사제회와 교회가 처한 객관적으로 위중한 긴급상황이 그러한 결정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에게 남겨 주신 유산과 함께 1988년 주교 성성을 정당화한 근본적인 이유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이러한 이유들은 여러 면에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절박함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의 성직자들을 인도하는 나침반으로 남아있고, 그들이 가까운 장래에 노선을 바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이 새로운 교황직—특히 가장 최근의 추기경 회의를 통해—에서 이미 형태를 갖춘 주된 방향성은 이를 확인시켜줄 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노선을 교회 전체의 되돌릴 수 없는 궤도로 보존하겠다는 노골적인 결정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황님께 전통을 수호하고 교회의 충실한 참된 아들들을 양성하는데 우리의 온 힘을 기울이겠다는 약속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교구 본당에서, 신자들이 더 이상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는데 필요한 수단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특히 가톨릭의 진리와 도덕에 대한 온전한 설교, 그리고 교회가 항상 해오던 방식으로의 성사의 합당한 집행이 모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박탈이 바로 긴급 상황을 구성합니다. 이 중대한 상황에서 우리의 주교님들은 고령이 되고 있고, 종도직이 계속 확장됨에 따라 전 세계 신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습니다.
- 지난달 추기경 회의가 어떤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취한 방향을 확인한다고 보십니까?
페르난데스 추기경은 레오 교황님을 대신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핵심 회칙 Evangelii gaudium에서 피력하신 근본적 직관으로 돌아가도록 교회를 초대한다고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추기경은 그리스도와 즉시 조우하는 “경험”을 도출하기 위해 복음이 원시적이고 근본적인 표현, 일련의 구체적이고 두드러진 정형인 “케리그마(kerygma)”로 환원되어 선포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전통을 이루는 모든 것은 부수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바로 이것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교황직의 특징을 이루는 교리적 허무를 낳은 새로운 복음화의 방법이며,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이 예리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 시대의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새롭고 관련된 답을 누군가는 제공해야 하지만, 페르난데스 추기경에 따르면 이는 교회의 전통이 제공하는 고전적이고 영원히 유효한 답을 재발견하는 것보다 시노드 개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단을 통해 이 시노드 개혁의 “성령의 숨결”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혼 후 시민법상으로 재혼한 사람들에 대한 영성체 허가 또는 동성결합 커플의 강복과 같은 재앙적인 결정을 교회 전체에 부과할 수 있었습니다.
요약하면, “케리그마”를 통해 복음의 선포는 전통 교리와 도덕 전체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갑니다. 그리고 시노달리티를 통해 전통적 해답은 터무니없고 교리적 정당성이 없을 위험이 높은 자의적 결정으로 치환됩니다. 젠 추기경은 이 방법을 속임수로 보고 이를 성신께로 돌리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합니다. 안타깝지만 제 생각에 젠 추기경이 맞는 것 같습니다.
- 총장님께서는 교회에 대한 봉사를 말씀하시지만 실제로는 사제회가 교회에 도전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고, 특히 주교 성성이 구상 중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 점을 교황님께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영혼들에게 봉사함으로써 교회에 봉사합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고려사항과도 무관한 객관적 사실입니다. 근본적으로, 교회는 영혼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영혼들의 성화와 영혼들의 구원입니다. 온갖 훌륭한 연설, 다양한 토론, 논하거나 논할 수 있는 주제들은, 만일 그 최종 목적이 영혼들의 구원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 점을 되새기는 것이 필수적인 이유는 교회가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 둘 다에서 동분서주할 위험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생태학적 관심, 또는 소수집단, 여성, 이민자의 권리에 치중하는 것은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을 시야에서 놓칠 위험을 낳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 비오 10세회가 이 모든 것을 수반하면서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애쓴다면, 그것은 오로지 이러한 보물들이 영혼들의 구원에 필수적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영혼들의 선익, 그리고 그들의 성화를 위해 서품 받는 사제직의 선익만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교구 본당에서, 신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이 긴급 상황을 구성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보존하고 있는 것을 교회의 처분에 바칩니다. 우리는 오래되고 먼지 낀 옛날 물건들의 박물관이 아니라 충만하고 비옥한 전통을 교회에 바쳐서 이로써 영혼들을 성화하고 변모시켜 성소자와 참된 가톨릭 가정을 낳습니다. 다시 말해, 이 보물의 가치가 다시금 이해되고 교황님이 교회 전체의 선익을 위해 이 보물을 사용하기를 원하시게 될 그 날까지 우리가 이 보물을 보존하는 것은 교황님 본인을 위해서입니다. 전통은 교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 총장님은 영혼들의 선익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사제회는 영혼들에 대한 사명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제회는 50년도 더 전에 교회법적으로 해산되었습니다. 영혼들에 대한 사제회의 사명을 어떤 근거로 정당화할 수 있는지요?
이는 단순히 애덕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사명을 우리 자신에게 돌리고 싶지는 않지만, 동시에 우리는 점점 더 갈피를 못 잡고 방향을 잃고 길 잃은 영혼들의 영적 곤궁에 부응하기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탐색한 끝에 그들이 교회의 전통의 풍요로움에서 깊은 기쁨과 빛과 위로를 발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이러한 영혼들에게 우리는, 설령 우리에게 공식적인 사명이 없을지라도 진정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는 거리에서 위험에 처한 사람을 봤을 때, 설령 자기가 소방관이나 경찰관이 아닐지라도 자기 능력에 따라 그를 돕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의지하는 영혼들의 수는 해가 지남에 따라 증가했는데 특히 지난 10년 동안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들을 포기하는 것은 그들을 배신하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교회 자체를 배신하는 것인데, 다시 말하지만, 교회는 영혼들을 위해 존재하고, 헛되고 무익한 담론을 제공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애덕이 다른 모든 의무를 다스리는 의무입니다. 바로 교회법이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애덕의 사법적 표현인 교회법의 정신에서 영혼들의 구원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섭니다. 애덕은 진정 법 중의 법을 나타내며 다른 모든 법이 애덕에 종속되고 어떤 교회법도 애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최상의 법은 영혼들의 구원(suprema lex, salus animarum)”이라는 공리는 1983년 교회법전의 마지막 조문에 의해 명시적으로 제시된 교회법적 전통의 고전적인 금언입니다. 현재의 긴급 상황에서, 우리에게 의지하는 영혼들을 향한 우리의 종도직과 우리의 사명의 정당성 전체가 바로 이 상위의 원칙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애덕의 이름으로 결핍을 보충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 주교 성성의 계획이 사제회에 의지하는 신자들을 딜레마, 즉, 전통이 암시하는 모든 의미 그대로의 온전한 전통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교계와의 “완전한” 친교를 택할 것이냐 하는 고민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현실적으로 이 딜레마는 겉보기일 뿐입니다. 가톨릭 신자는 온전한 전통과 교계와의 친교를 모두 보존해야 합니다. 그는 이 두 재산 사이에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친교는 본질적으로 가톨릭 신앙과 그에 수반되어 참된 성사 생활에서 시작되는 모든 것 위에 세워진다는 것과, 이를 위해서는 사목에 맡겨진 영혼들의 영적인 선익을 목적으로 자의적이 아닌 진정한 권위를 사용하여 이 신앙을 전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보장하는 통치권의 행사가 요구된다는 것이 너무 자주 잊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토대—교회의 친교가 존속하는 데 필요한 조건—를 수호하기 위해, 사제회는 설령 그것이 교회 안에서 정당한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하더라도, 그 친교를 저해하고 왜곡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 사제회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생각나는 첫 번째 사례는 2019년으로 거슬러 갑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아라비아 반도 순방에서 이맘과 함께 저 유명한 아부다비 선언에 서명하셨습니다. 교황님은 무슬림 지도자와 함께 종교 다원성은 천주의 지혜가 원하신 것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러한 진술을 용납하거나 포함하는 것에 기초한 친교는 전혀 가톨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친교는 천주십계 제1계를 범하는 죄이자 신경의 첫 번째 조항의 거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러한 진술을 단순한 오류 이상으로 간주합니다. 한마디로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가톨릭 친교의 토대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해산의 이유가 됩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라면 그런 주장을 용납하느니 차라리 치명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전 세계를 통틀어 사제회가 오랫동안 규탄해온 오류들에 대해 깨어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특히 인터넷 상에서 그렇습니다. 이 운동을 주교 성성 같은 강력한 공개적 제스처로 개입하기보다 천주의 섭리에 맡겨 발전하도록 놓아두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이 운동은 분명 긍정적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운동은 사제회가 수호하는 것의 견고함을 나타내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이 진리가 전파되도록 격려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렇긴 하나, 이 운동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신앙의 투쟁은 인터넷 상에서의 토론과 자리 싸움으로 국한될 수도 없고 그런 것을 통해서 낱낱이 다루어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성화는 정통 신앙 고백에 달려있음은 분명하지만, 신실한 그리스도교인의 생활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일에 영혼들은 인터넷을 찾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영혼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명을 듣고, 훈화를 주며, 미사성제를 거행하고, 그들을 진정으로 성화하여 천주께로 이끌어 주는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영혼들은 사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제를 얻기 위해서는 “인플루언서”가 아니라 주교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현실로 돌아가야 합니다. 즉, 영혼들의 현실과 그들의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필요라는 현실입니다. 주교 성성은 전통을 고수하는 신자들을 위해 견진성사와 성품성사의 집행, 그리고 이 두 성사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것을 보장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 사제회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사제회가 결국 스스로를 교회로 간주하거나 스스로에게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부여하게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사제회는 결코 교회의 자리를 차지하거나 교회의 사명을 맡는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오로지 교회가 언제 어디서나 설교하고 믿고 행해온 것에만 의존하여 오직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의식을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제회는 교회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는 것도 깊이 의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정배를 보존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교회를 그침 없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제회는 단순히 교회에 충실히 남아있을 수 있는 특권적 수단일 뿐입니다. 2000년 동안 교리와 성사로 자녀를 길러온 자모이신 교회의 사명을 받드는 사제회는 온전한 전통이라는 유산에 충실히 남아있을 수 있는 독보적 자유를 이용하여 전통을 보존하고 수호하기 위해 효심을 다하여 자신을 바칩니다. 르페브르 대주교님의 표현에 따라, 사제회는 “교리를 계속 전하는 가톨릭교회의” 소산에 불과합니다. 사제회의 역할은 “특사”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사제회는 모든 가톨릭 사제들이 이 의무를 이행하는 데 동참하기를 무엇보다도 간절히 바랍니다.
- 교황님으로 돌아가보죠. 총장님은 사제회가 교황님의 위임 없이 주교를 성성하는 것을 성하께서 수용하거나 적어도 용인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교황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교황님은 교회에 봉사하겠다는 올바른 지향과 진심 어린 의지, 그리고 무엇보다 예외적인 상황에서 진정한 양심의 문제를 분별할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이 요소들은 객관적인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사제회를 아는 사람이라면 사제회의 입장에 꼭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이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 이론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로마가 사제회의 입장에서 내리는 그런 결정을 용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미래는 성하의 손에, 그리고 물론, 천주님의 섭리에 달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영혼들의 선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순간, 성좌는 때로는 어떤 실용주의를, 그것도 놀라운 융통성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좌와 중국 정부의 관계에 관한 현재의 사건을 예로 들어 봅시다. 중국 애국교회의 진짜 이교행위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충실한 지하교회가 끊임없는 박해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기적으로 갱신하던 조약을 중국 당국이 깨뜨렸음에도 불구하고, 2023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중국 당국이 임명한 상하이 교구 주교를 a posteriori(사후) 승인했습니다. 더 최근에 레오 14세 교황님은 성좌 공석 기간 동안 같은 식으로 지명된 신샹 교구 주교의 임명을 a posteriori 승인한 반면, 오랫동안 투옥되었던 로마에 충실한 주교는 아직 재직 중입니다. 두 경우 모두 명백히 친정부 성향의 고위성직자로서 베이징 정부가 중국 내 가톨릭교회를 통제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임명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이들은 단순히 보좌 주교가 아니라 자기 교구(또는 관구)의 상주 주교, 즉 지역 성직자와 신자들에 대한 재치권을 소유한 정규 사목자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이러한 사목자들이 어떤 목적으로 선택되고 일방적으로 임명되었는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 비오 10세회는 영혼들의 선익, 그리고 그들의 성화를 위해 서품을 받는 사제직의 선익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사제회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경우는 공산주의자 또는 반 그리스도교 세력을 선호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왕의 권리와 교회의 전통의 권리가 중대하게 훼손되고 있는 전반적인 위기와 혼란의 시대에 이 권리를 수호하는 것임은 명백합니다. 의도와 목적이 분명히 다릅니다. 교황님은 이것을 알고 계십니다. 더욱이, 성하께서는 사제회가 주교들에게 어떠한 재치권(裁治權)도 부여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계십니다. 재치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평행 교회를 세우는 것에 상응할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교황님이 베이징 정부보다 사제회에서 영혼들에게 더 큰 위험이 나온다고 걱정하실지 잘 모르겠습니다.
- 전통 미사에 관해서, 영혼들의 필요가 1988년처럼 지금도 중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성 비오 5세 전례의 저 유명한 변천 후, 2007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이 전례를 해방시키셨고, 2021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제한을 부과했습니다. 새 교황님과 함께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제가 아는 한, 레오 14세 교황님은 이 주제에 대해 확실한 분별력을 유지해 오셨습니다. 이 때문에 보수 진영은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로시 추기경이 전례에 관하여 작성한 글—원래 지난달 추기경 회의에 참석한 추기경들을 위해 작성한 글—이 공개되었습니다. 이 글이 큰 틀에서 교황님이 원하는 방향과 일치하는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분명한 글이고, 무엇보다, 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짓 전제에 기초한 글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글은 Traditionis custodes와 완전한 연속선 상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전례 프로젝트를 단죄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에 따르면, 옛 전례와 새 전례는 같은 신앙과 같은 교회론을 표현하는 다소 동등한 두 양식이고,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치를 염려한 베네딕토 16세는 두 전례의 공존을 촉진하려고 하셨고, 그래서 2007년에 Summorum Pontificum을 발표하셨습니다. 이 문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든 시대의 미사를 섭리적으로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 전례에 의문을 제기하는 운동도 야기했는데, 이 운동에 문제가 있다고 간주되어 2021년 Traditionis custodes는 이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충실한 로시 추기경은 현재 베네딕토 16세와 상반되는 개념에 따라 교회의 불가해한 일치를 추진하려고 시도 중입니다. 로시 추기경은 개혁을 통해 한 전례가 다른 전례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두 전례의 공존을 단호히 반대합니다. 그는 두 전례의 공존 안에 분열의 씨앗, 일치에 대한 위협이 있다며, 이는 진정한 전례적 친교로 돌아감으로써 극복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교회 일치의 일차적 유익은 분열을 막는 것이 아니라 공유될 수밖에 것을 공유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얻는다.” 교회에는 전통의 참된 의미와 완전히 동조하는 “오직 하나의 전례만 있어야 한다.”
이는 공정하고 일관성 있는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교회론을 갖는 교회는 이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전례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의 잘못된 개념에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로시 추기경은 공의회 이후의 새로운 교회론과 일치하여 전통을 무언가 진화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새 전례를 우리 시대의 유일하게 살아있는 표현으로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트리엔트 전례의 가치는 진부한 것으로 간주될 뿐이고, 이 전례의 사용은 기껏해야 “양허(讓許)”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홍보되지 않습니다”.
두 전례 사이에 “분열”과 양립 불가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명백해 보입니다. 그러나 실수하지 맙시다. 교회와, 그리스도교인의 삶과, 가톨릭 사제직의 전통적 개념, 즉, 성전(聖傳)을, 불변의 비진화적 방식으로 적절히 표현하는 유일한 전례는 모든 시대의 전례입니다. 이 점에 대한 성좌의 반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돌이킬 수 없어 보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시 추기경은 전례 개혁의 구현에 있어서 여전히 구체적인 문제들이 있다고 솔직하게 시인합니다. 이것이 개혁의 한계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60년이 흘렀는데도 전례 개혁을 적용하기가 정말 힘들고 그 풍요로움이라는 것을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이 이 주제를 다룰 때마다 반복해서 들리는 불평이고 로시 추기경의 글이 회피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새 미사의 본질적 결함, 따라서 개혁의 전반적인 실패에 진지한 문제를 제기하는 대신, 성당들이 텅 비고 성소자가 급감하는 현실에 직면하는 대신, 트리엔트 전례가 그렇게 많은 영혼들을 계속 끌어당기는 이유를 묻는 대신, 로시 추기경은 신자들과 신학생들을 위한 시급한 예비 교육 외에 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합니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한 추기경은 따라서 악순환에 들어갑니다. 영혼들을 양성하기로 되어 있는 것은 전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거의 2000년 동안 영혼들—흔히 문맹인들—은 다른 어떤 사전 교육도 필요 없이 전례에 의해 교화되고 성화되었습니다. 노부스 오르도가 영혼들의 양성과 교화에 본질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 나은 사전 교육만 요구한다는 것은 제가 볼 때 치료가 불가능한 맹목의 신호입니다. 우리는 충격적인 역설에 도달합니다: 개혁은 신자들의 더 많은 참여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신자들은 집단으로 교회를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이 무미건조한 전례가 그들에게 아무 영양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인데—아마 개혁과는 관계가 없겠지요?
-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사제회 외의 단체들이 1962년 미사경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가능성은 1988년에는 거의 전무했습니다. 이 현상이 당분간 충분한 대안이 되어서 새 주교 성성을 시기상조로 만들지는 않을까요?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가능성이 교회와 영혼들이 진정 필요한 것에 상응하는가? 영혼들의 필요에 충분히 부응하는가?
전통 미사가 거행되는 곳마다 신성함에 대한 심오한 감각으로 빛나는 교회의 참된 전례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거행이 이루어지는 테두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당사자들의 선의와는 별개로, 특히 Traditionis custodes의 발표와 로시 추기경이 이를 확인한 이후로, 교회의 테두리는 공식적이고 “정상적인” 유일한 전례는 오직 바오로 6세의 전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시대의 전례의 거행은 예외적인 체제 하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전례를 고수하는 사제들은 무상의 자비에 의해 이 전례를 거행할 수 있는 관면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관면은 새로운 교회론의 논리에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단체들은 새 전례가 신자들의 신심의 기준이자 교회의 생명의 참된 표현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합니다.
- 이 예외적 테두리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해지는 것은 선하지 않은가요?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가 유감스러울까요?
이 상황은 적어도 세 가지 유해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가장 즉각적인 결과는 심각한 구조적 취약성입니다. 트리엔트 전례를 사용할 수 있는 특정한 특권을 누리는 사제들과 신자들은 미래에 대한 걱정 속에 살아갑니다—특권은 권리가 아니니까요. 당국이 용인하는 한에서는 문제없이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국이 특정한 요구를 하거나, 조건을 부과하거나, 어떤 이유에서 갑자기 허가를 철회하는 순간, 사제들과 신자들은 갈등에 처하게 되고, 영혼들이 마땅히 기대해야 할 전통적인 지원을 효과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방어 수단이 사라집니다. 교회의 생명에 대한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개념—양립 불가능한 두 가지 전례에 구현된—사이에서, 한쪽은 완전한 정당성을 누리고 다른 한쪽은 단지 용인되기만 하는데, 어떻게 이러한 양심의 문제를 장기적으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더 심각한 결과인데—이 단체들이 트리엔트 전례를 고수하는 이유가 더 이상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는 교회의 전통에 대한 공개적인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결과적으로 영혼들의 선익도 심각하게 훼손합니다. 과연, 모든 시대의 미사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현대 미사가 교회 전체에서 거행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고 어떤 선호나 적절한 카리스마와 관련된 특별한 특권만을 주장한다고 비춰진다면, 이 모든 시대의 미사가 새 미사에 근본적으로 대립하며 교회 전체의 유일한 참된 전례라는 것과 누구도 이 미사를 거행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바오로 6세의 미사는 가톨릭 미사성제 신학에서 상당히 이탈한 것이므로 인정될 수 없고 누구도 이 미사를 거행하도록 강요받을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영혼들이 이 독이 든 전례에서 벗어나 가톨릭 전례의 순수한 샘물을 마실 수 있도록 어떻게 효과적으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사제회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서 교회에 충실히 남아있는 특권적 수단입니다.”
마지막으로, 전술한 두 가지 결과에서 파생되는 보다 광범위한 결과는, “불안감을 주는” 행동은 취약한 안전성을 파괴한다는 두려움이 많은 사목자들을 신앙이나 도덕을 부패케 하는 추문적 가르침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 강요된 침묵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입니다. 이 독이 든 양식으로 위협받는 영혼들의 선익을 위해서는 교회를 파괴하는 오류를 규탄해야 하지만, 결국 행해지지 않습니다. 어떤 오류의 유해성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개인적으로는 깨우치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특히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순된 원칙의 그늘 속에서, 필수적인 자유를 가지고 진리가 자기를 표현하려 애쓰는 소심한 속삭임일 뿐입니다. 다시금, 영혼들은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한 채 교리의 빵을 빼앗기며 굶주린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는 점차적으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교회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개혁들을 관대하게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사제회는 이러한 영혼들에 대해서도 그들을 깨우쳐 주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는 판단이나 단죄의 문제가 아니라 눈을 뜨고 사실을 인정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전통 전례의 사용이 적어도 공의회 개혁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남아있는 한, 이 전례에서 유익을 얻는 단체들은 교회와 영혼들이 겪는 심오한 필요에 충분한 응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히려, 이미 표현된 개념을 이어가기 위해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 개념을 완전히 살아내기 위한 수단과 함께 타협 없는 진리를 제공하고 조건 없이 그들을 섬겨야 하며, 이는 영혼들의 구원과 교회 전체를 섬기기 위함입니다.
- 그렇긴 하지만 로마가 전통 미사에 관해서 향후 보다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로마는 향후 보다 열린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로마가 사제회로부터 신자들을 빼내기 위해 특정 단체들에게 옛 미사경본을 허가했을 때 비슷한 상황이 1988년에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교의적 결정보다는 정치적 결정에 더 가까운 것입니다. 트리엔트 미사경본은 오로지 극존하신 천주를 흠숭하고 신앙을 살찌우기 위한 것입니다. 사목적 조정의 도구나 회유의 변수로 수단화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러나 무상의 자비가 크건 작건 앞서 설명한 테두리의 해로움을 아무 것도 바꾸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상황은 실질적으로는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 시나리오는 현실에서는 더 복잡합니다. 로마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로시 추기경은 성 비오 5세 미사경본의 사용을 확장하는 것은 전례 개혁과 공의회에 대하여 성가시고 무엇보다도 통제할 수 없는 규모의 문제 제기를 불가피하게 촉발시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견하기 힘들지만, 교의적이 아닌 정치적인 논리에 갇힐 위험이 실존합니다.
- 신자들과 사제회 회원들에게 특별히 하시고 싶은 말씀은?
지금은 기도하며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준비하는 때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주교 성성이 교회 전체에 중요한 계기가 될 성총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준비는 성찰, 평화, 그리고 천주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천주님의 섭리는 사제회를 버리신 적이 없고 지금도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 지금도 교황님을 뵙기를 희망하십니까?
그럼요. 물론입니다. 성하와 말씀을 나누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하께 말씀드리고 싶지만 서한에는 담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페르난데스 추기경의 답장은 교황님을 알현할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제재의 가능성도 환기시키고 있죠.
- 성좌가 사제회를 단죄하기로 결정한다면 사제회는 어떻게 될까요?
우선,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법적 형벌은 실효가 없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재가 발표된다면, 사제회는 과거에 고통을 받아들인 것처럼 이 새로운 고통을 괴로움 없이 분명히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교회를 위해 바칠 것입니다. 사제회가 일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러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천주님의 것이고 주님께서는 교회를 버리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제회는 가톨릭 성전(聖傳)에 충실하고 영혼들의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교회를 겸손히 섬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 계속 일할 것입니다. 또한 사제회는 2009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부당한 제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늘 그래왔듯이 효심을 다해 교황님을 위해 계속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천주님의 더 큰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이 주교 성성이 신덕의 보존에 섭리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을 로마 당국이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2026년 2월 2일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취결례 축일에
플라비니 쉬르 오제랭에서.